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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철도 비밀노트–3화] 평화와 화해의 시대로

꾸준히 준비되어 온 남북철도

양정규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21/04/13 [09:00]

[북한철도 비밀노트–3화] 평화와 화해의 시대로

꾸준히 준비되어 온 남북철도

양정규 객원기자 | 입력 : 2021/04/13 [09:00]

(기획특집 시리즈 남북철도 봄은 오는가) = 반세기 이상 단절되어 온 남북철도를 복원하기 위해 애써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측 인사들과 만나 실무협의를 하고 실제로 진행을 맡았던 실무자들의 생생한 이야기,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다양한 비화를 모아 전해드립니다. 남측과 북측이 나눴던 팽팽한 긴장감과 때론 따뜻하고도 찡했던 분위기를 느껴보세요. 매월 둘째 넷째 화요일, 남북철도 복원의 역사 속으로 함께 떠나요! =

 

[국토매일=양정규 객원기자/작가] 조지W. 부시 미국 대통령이 경의선 복원에 쓰일 철도 침목에 직접 사인하자, 전 세계에서 모여든 취재기자들이 일제히 카메라 프레시를 터트렸다. 2002년 2월 20일, 도라산역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 조지W. 부시가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한 지 2주 만에 방한한 것이어서 더욱 지구촌의 시선이 모아졌다. 부시는 이날 연설에서 북한에 대화재개를 촉구하며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기원했다. 사실 그는 이날 연설에서 ‘악의 축’ 발언을 반복하려다 김대중 대통령의 만류로 그만둔 것이라고 당시 주한미국대사였던 토머스 허버드가 회고하기도 한다.  © 국토매일

 

도라산역은 비무장지대(DMZ) 남방한계선에서 불과 700여m 떨어져 있는 경의선의 남쪽 마지막역으로, 이날 이곳에서 만난 한미 두 정상은 남과 북의 통일을 기원하는 연설을 한 후 비무장지대 철책선을 바라보며 경의선 복구상황을 보고 받았다. 

 

이날 행사를 위해 김대중 전대통령이 역대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열차를 타고 임진강을 건너 도라산역에 도착하는가하면, 한미연합사령관 뿐 아니라 경의선이 끊기기 바로 직전, 마지막 경의선 기관차를 운전했던 한준기씨 등도 참석하여 이날 행사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 전쟁의 상처는 사람에게만 남은 게 아니었다. 철마는 전쟁 초기, 25량 화차에 군수물자를 싣고 달렸던 증기기관차였지만 1950년 12월 퇴각하던 연합군에 의해 파괴돼 경의선 장단역 부근에 버려져 녹슬어가고 있었다.   © 국토매일

 

이처럼 전세계가 주목했던 ‘경의선 연결’은 단순히 철길을 연결한 ‘사실’이 아닌, 분단된 남북간의 협력과 화해의 상징이 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햇볕정책 덕분에 남북간 화해무드가 조성되어 통일에 대한 기대가 최고조에 이르던 때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2000년 6월 15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 위원장이 평양에서 만나 손을 맞잡고 함께한 남북공동선언은 8·15 광복 이후 남북 최고 지도자가 합의하여 발표한 최초의 선언이었다. 이를 계기로 남북철도연결 복원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출처=통일부)  © 국토매일

 

반세기 이상 잡초만 무성하던 경의선에 훈풍이 불기 시작한 때는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부터였다. 평양에서 발표된 6·15 남북공동선언은 8·15 광복 이후 남북 최고 지도자가 합의한 최초의 선언으로 그 의미가 더욱 컸다.

 

벼랑 끝의 고양이와 쥐처럼 긴장 상태를 유지하던 남과 북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밝게 웃으며 손을 맞잡은 한 장의 사진은 전 세계인들의 관심과 응원을 받기에 충분했다.

 

같은 해 7월과 8월 제주도에서 개최된 제1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도 ‘남과 북은 경의선 철도의 끊어진 구간을 연결하며, 이를 위한 문제는 빠른 시일 내에 협의하기로 한다’는 조항을 넣음으로써 남북철도 복원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경의선 연결공사 사업은 2000년 9월18일 기공식을 기점으로 본격 추진되었다.

 

▲ 경의선 철도·도로연결 기공식은 2000년 9월 18일 경기도 파주 임진각 앞에서 열렸으며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임진각 `통일의 집' 앞 행사장으로 입장해 콘크리트 침목에 통일의 염원을 담은 메시지를 써 넣으면서 시작됐다.  © 국토매일

 

▲ 김 대통령은 분단과 냉전의 상징이었던 경의선 철도를 잇는 오늘의 기공식이 민족의 화해와 협력의 새 시대로 나아가는 민족사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단상에 올라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과 악수를 나눈 뒤 자리에 앉아 기공식을 함께 했다. 이날 기공식에는 전직대통령과 주한외교사절 등 1000여명이 참석했다.  © 국토매일

 

▲ 김 대통령이 기공식 축하기념 버튼을 누르자 임진각 앞 철교에서 축포가 터지면서 수많은 연기와 오색 풍선이 날아올랐다.  © 국토매일

 

▲ 이어 경의선 마지막 기관사인 한준기 씨가 모는 증기기관차가 등장했으며 한 씨는 동승한 김재원 기관사와 승무신고를 하고 임진각 철교 앞까지 약 20여m를 운행했다.  © 국토매일

 

남측의 경우 당시 건설교통부(지금의 국토교통부) 밑에 철도청이 따로 있었는데 철도청에서 건설과 운영을 모두 담당했기 때문에 경의선 연결지침을 건설교통부가 철도청에게 주어 ‘남북철도연결 건설사업단‘이라는 전담조직을 출범시켰다.

 

남과 북은 경의선 복원에 대한 세부계획이 필요했다. 남과 북을 오가는 문제가 까다로웠으므로 남북 양측은 해당 지역 철도연결공사를 직접 시공하되, 상호 합류하여 시공하고 수시로 교류하기로 합의했다.

 

남측구간의 경우 철도청의 발주로 문산역-임진강 교량 간 9km 연결이 시행되었고 궤도부설 및 전기·신호 공사는 철도청이, 임진강 교량-군사분계선 간 3km에 대한 토공 등 노반공사, 그리고 군사시설 및 지뢰 등 지하매설물 처리는 우리 군이 맡기로 했다.

 

남북철도 연결과 관련된 실시설계, 용지매입 등은 이미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1단계로 문산-봉동까지 단선철도, 2단계 문산-개성간 단선 전철화, 3단계 문산-신의주간 복선 전철화를 목적으로 사업계획을 수립, 추진해 나갔다.

 

북측구간은 노반공사 및 궤도공사 등을 북측에서 직접 시행하는 한편 레일, 침목 등 주요자재는 남측에서 지원하는 방안이 논의됐다. 궤도부설, 전기·신호 공사는 안전운행과 관련되므로 우리측 고급 기술자들이 북측과 함께 감리시행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북측은 초기부터 진행이 매끄럽지 못했다. 추운 겨울 날씨 때문에 공사가 중단되는가 하면 이후 후속 합의가 제대로 없었다면서 공사를 아예 중단해버렸다. 남북철도 복원사업은 한쪽만의 실행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기에 북측을 끈질기게 설득해야만 했다.

 

그 결과 2001년 9월15일 제5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서울-신의주' 사이의 철도를 우선적으로 개통하는 것을 합의해 냄으로써 하나둘씩 차근차근 진척시켜 나갈 수 있었다.

 

▲ 경의선 복원 사업으로 임진강 이남에 임진강역이 설치되어 문산역까지 연장운행이 실시됐다.   © 국토매일

 

▲ 임진강역은 2001년 9월30일 영업을 개시했다. 1945년 경의선 문산 이북역의 목록을 보면 문산역 다음역이 바로 임진역인데, 남북철도 복원사업으로 복원된 선로에 세워진 역이기 때문에 임진강역은 임진역을 계승한 역이라고 할 수 있다.  © 국토매일

 

▲ 전쟁통에 파괴되어 끊어졌던 임진강철교는 2000년 경의선 복원이 시작되면서 문산역까지 다시 연결시켜주었다.  © 국토매일

 

경의선은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압록강까지 자유롭게 왕래하던 철길이었다. 휴전으로 인해 비무장지대가 들어서면서 잡초만 무성히 자라던 곳이었는데 경의선 연결 일부 구간인 문산-임진강역까지 공사가 완료됨에 따라 2002년 9월 30일 임진강역까지 주중 매일 5회, 주말 및 공휴일에는 매일 9회 왕복 운행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정밀안전진단 당시 경기북부지역 수해로 인해 임진강철교 구간 중 변형되거나 부식된 구간이 발견되어 전면교체 했고 문산터널은 일부 구간에서 발생한 누수 관련한 보수와 터널 내부 배수시설 정비를 완료한 결과였다.

 

▲ 경의선 철도 비무장지대 이남 남측구간에 대한 공사 중 임진강 교량-군사분계선 간 3km에 대한 토공 등 노반공사, 그리고 군사시설 및 지뢰 등 지하매설물 처리는 우리 군이 맡아 진행했다.  © 국토매일

 

▲ 공사남측구간의 경우 철도청의 발주로 문산역-임진강 교량 간 9km 연결이 시행되었고 궤도부설 및 전기·신호 공사는 철도청이 담당해 진행함으로써 2001년 12월 30일 공사를 마무리했다.  © 국토매일

 

사실 초기 철도 복원사업 대상은 경의선 뿐 아니라 경원선, 금강산선, 동해북부선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신탄리부터 평강간을 잇는 경원선의 경우 동해안 대북물자 소송에 유리하며 나진, 선봉지역과 시베리아횡단철도(TSR)을 통한 유라시아 수송로를 확보하는데 필요한 구간이었다.

 

철원에서 내금강을 잇는 금강산선의 경우 금강산 관광과 관련하여 수익성 있는 독립노선으로 개발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강릉에서 대진간 타당성조사를 완료한 동해북부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 남과 북은 7차례에 걸친 수석대표 접촉을 통해 2002년 9월 18일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 도로 연결 착공식을 남북이 동시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남측에선 11시에 하되 경의선은 남방한계선 제2통문 앞에서, 동해선 착공식은 송현리 통일전망대 앞에서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으며 구체적인 행사 계획은 하루 전 상호 교환을 원칙으로 하고 철도는 단선, 철도 분계역은 비무장지대 밖 자기 측 구간의 편리한 위치에 각기 건설하기로 합의했다.  © 국토매일

 

▲ 남북철도 도로 연결 착공식은 남측 경의선의 경우 도라산역 북부에서 김석수 총리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하였다.  © 국토매일

 

▲ 동해선은 2002년 9월 철도연결공사 착공식을 시작으로 2003년 6월 경의선·동해선 군사분계선상에서 남북 철도 궤도 연결행사를 열기도 했다. 북측은 경의선의 경우 개성 봉동역에서 조창덕 부총리 등 2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고 알려졌다.  © 국토매일

 

경의선이나 동해선보다는 경원선 연결이 더 시급하다고 보는 입장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경원선은 철원지구쪽이 군사적으로 긴장감이 높은 반면, 경의선의 경우 서해안 공단개발 지원 및 대북물자 수송에 유리하고 남북한의 수도인 서울과 개성을 통과하는 주간선을 연결한다는 상징적 효과가 컸기 때문에 먼저 선택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 2003년 6월 14일 열린 경의선 및 동해선 철도 연결행사는 경의선 및 동해선 철도 연결지점(군사분계선)에서 동시에 개최됐다. 연결행사는 남북 당국의 국장급 인사가 각각 주관하며 철도 연결작업과 관련 인원, 행사 인원, 기자 등 각각 50여 명이 참가하였다.  © 국토매일

 

▲ 연결행사 진행은 사회자(경의선은 남측, 동해선은 북측이 담당) 안내에 따라 쌍방 행사 주관자가 연결, 체결하는 방법으로 실시하였으며 연결작업은 레일 연결장치 설치-연결부 코일스프링 채우기-이음매판 설치-연결부 볼트 체결-자갈 정리작업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 국토매일


동해선은 2002년 4월 특사 방북시 동해선의 철도·도로 연결을 합의함에 따라 2002년 9월18일 철도의 날에 남북한 동시 착공식을 함으로써 시작 되었으며, 2003년 6월 14일 군사분계선(MDL)상에서 역사적인 남북철도 연결행사를 진행하게 된다.

 

동해선 기공식 당시 참석했던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북측은 철도관련 행사에 대한 엄청난 부담이 있었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남측에서는 전문 장비들을 동원하여 발표를 진행한 반면, 북측은 전문 장비 없이 삽자루에 새끼를 매어 양쪽 사람이 손으로 당기면서 흙을 퍼내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측량을 하더라도 남측에서는 첨단 측량 장비를 이용했지만 북측은 일제강점기 때 사용하던 방식, 즉 사람이 직접 몸을 움직여 재는 재래식 방법을 썼다. 하나부터 열까지가 수준 차이가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이 무척 강했던 북측은 남측에게 기죽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보였다.

 

당시 남북철도 복원사업의 최종 목표는 대륙횡단철도였다. 김대중 대통령 재임기간인 1999년 6월부터 청와대 경제수석실 건설교통부 비서실로 파견됐던 한 관계자에 따르면 남북철도 연결을 통해 남한의 국민들도 TSR을 이용해 유럽까지 가는 것이  김대중 전대통령의 원대한 꿈이었다고 한다. 철도로 대륙횡단이 가능하려면 당연히 남과 북의 철도를 연결해야 하는 일이 급선무였을 것이다.

 

그러나 남과 북의 철도는 갈라져 운행된 시간만큼 각각 서로 다른 형태로 변모해 있었다. 남과 북의 철도시스템, 통신계통이나 신호 차이, 부품 제품의 표준화 등 차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 운행시 발생할 수 있는 위험 요인 등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북한철도는 화물수송의 90%, 여객수송의 50%를 철도가 분담하는 주철종도(主鐵從道)의 철도 중심의 운송시스템이었고 철도 총연장은 5235km로서 남측(3392km)보다 긴 철도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복선구간보다 단선구간이 월등히 많아 효율성이 떨어져 개보수가 시급한 것으로 파악이 됐다.

 

▲ 2004년 8월23일 남북공동 현장 점검 현장.  © 국토매일

 

▲ 2004년 10월31일 남북간 철도 연결구간 점검 현장.  © 국토매일

 

무엇보다 가장 큰 장애물은 북한철도의 노후화였다. 남한의 철도는 적극적인 투자와 기술 도입 등으로 최고속도 300km/h를 자랑하는 고속철도로 발전한 반면, 북한 철도는 오랜 경제난으로 제대로 보수 유지가 되지 않아 20km/h 이하인 구간이 상당수였다.

 

철길이 연결된다 하더라도 남측 기관차가 북측 철길로 넘어갔을 때 북측의 철길과 시설이 남측 기관차의 하중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문제도 대두됐다.

 

다만, 다행스러운 것은 대부분이 우리와 같은 표준궤(1435mm)로 부설되어 있어 궤간차이에 따른 운행지장은 없다는 것이었다.

 

2004년 4월 개성에서 열린 남북철도 도로 연결실무협의회 제4차 회의에서 채택된 ‘남북 사이의 열차 운행에 관한 기본합의서’에서는 열차의 안전, 철도 직원과 승객을 포함한 모든 인원들의 신변안전과 편의를 보장하고 열차의 정상적인 운행을 위한 규정 운영상의 차이 해소, 시설 완비를 위해 공동 노력하기 위한 방안을 명시했다.

 

이 기본합의서를 통해 남과 북은 열차의 정상 운영을 위한 규정 뿐 아니라 분계역장간 소통 관련, 사고 발생시 책임 문제, 차량 고장시 지원 방안, 통신설비의 주파수 공동 사용 운칙 등 열차운행을 위한 세부사항 등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하였다.

 

한반도 전역엔 평화와 화해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전문가들은, 경의선 일부 구간인 개성-평양 구간의 교량 부분이 완벽하지 않아 약간의 보강이 필요하지만 열차 속도를 낮춘다면 평양까지 가는 것은 문제없다고 진단했다.

 

▲ 경의선철도연결 복원사업으로 도라산역은 이제 더 이상 남쪽의 마지막 역이 아닌 북쪽으로 가는 첫 번째 역으로 탈바꿈됐다.     ©국토매일

 

▲ 도라산역에 퍼질 힘찬 기적소리를 기대하는 모든 이의 마음엔 화해와 평화의 염원이 깃들어 있었다.   © 국토매일

 

이렇듯 남북철도가 연결되자 도라산역은 이제 더이상 남쪽의 마지막역이 아니었다. 북쪽으로 가는 첫 번째 역으로서의 준비가 된 것이다. 

 

철도연결 복원사업에 혼신의 힘을 다했던 철도실무진들은 도라산역에 퍼질 힘찬 기적소리를 기대하며 변화무쌍한 세계정세와 북측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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