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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도 역사속의 진실 (중)

경인철도 부설과 9.18일의 기원

국토매일 | 입력 : 2018/12/04 [21:02]

▲ 배은선 코레일 송탄역장 (2013년 한국철도공사 사사편찬 담당)    

예를 들면, 완전히 배타적인 통행우선권을 갖는 일반철도는 ROW-A급으로 분류되며, 부분적 권한을 갖는 전용차로의 버스, 노면전차 등은 ROW-B급으로 분류된다.

 

이에 반해 일반 승용차처럼 별다른 전용차로도 없이 신호와 교통의 흐름에 따라 운행되는 교통수단은 ROW-C급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이 기준으로 볼 때 노면전차는 시내버스나 승용차처럼 도로교통수단에 더 가까운, 일반철도와는 다른 교통수단인 것이다.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는 철도 외적인, 다소 정치적인 문제이다. 19세기 말의 조선과 대한제국은 풍전등화와 같은 형국에 놓여있었다. 세계 열강이 자국의 이권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상황에서 일제는 오랫동안 공을 들여온 경인철도 부설권을 미국에 ‘빼앗겼고(엄밀한 의미에서는 올바른 표현이 아니지만)’, 그 미국은 서울시내 전력공급권과 전차부설권도 차지했다.

 

천신만고 끝에 미국인 모스로부터 공사가 진행중인 경인철도 부설권을 넘겨받은 일제는 경인철도에 앞서 미국 쪽 주도로 개통된 노면전차를 철도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전차는 일제에 적대적 감정을 갖고 있는 고종황제의 특별한 관심과 투자로 만들어졌고 ‘기껏해야’ 일부 서울지역 민중들의 이동편의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철도건설을 통한 대륙침략과 식량자원 확보에 관심을 갖고 있던 일제로서는, 전차는 시시해 보이거나 눈엣가시였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관점은 강제합병 이후에도 당연히 변화가 없었고, 광복 이후 그 철도를 인계받은 우리 선배들 입장에서도 굳이 새 논란거리를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일반철도와 노면전차는 그 건설목적과 운영방식이 다르다. 일반철도가 한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는 장거리 대량수송을 목적으로 배타적 통행우선권을 갖는 반면, 노면전차는 한 도심구간 내에서의 저속 단거리수송을 목적으로 제한적 통행우선권을 갖고 운영된다는 점이다.

 

게다가 철도 외적인 고려 등이 겹치게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궤도교통수단으로 태어난 노면전차는 철도의 효시로 인정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철도의 효시를 논하는 데 있어 비교적 최근에 일부 동호인들을 통해 제기되었던 논의는 진평선에 대한 것이다. 진평선은 1895년(?) 청일전쟁 당시에 일본군에 의해 진남포-평양 간 건설된 연장 80km의 협궤선로다. 이 노선은 전쟁 후 철거되었다가 1911년 표준궤로 다시 건설되었는데, 이 노선이 지금의 평남선으로 평양(직할시)과 남포(특급시. 진남포와 동일 지명, 1945년 개명) 간을 이어주고 있다. 

 

청일전쟁은 1894년 7월부터 1895년 3월까지 치러져 일본의 승리로 끝난 전쟁이다. 진평선이 언제 개통되어 언제 철거되었는지 자세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드나 길게 잡아도 운영기간이 6개월 정도일 것이다. 왜냐하면,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혼란기를 틈타 경인, 경부 간 철도건설을 획책하는데, 이 시기가 1894년 10월이기 때문이다.

 

경인철도 건설에 착수했던 일본은 의외로 전쟁이 쉽게 끝날 듯하자 철도건설을 뒤로 미루고 북상을 계속한다. 따라서 진평선은 적어도 일본이 평양교전에서 승리(1894. 9. 17.)하고 경인철도 속성건설계획을 변경한 10월 이후 착공하여 연말경에 궤도공사가 마무리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진평선 건설이 일본 정부의 전략적 판단과 지원 하에 이뤄졌는지 혹은 지역 주둔부대의 전술적 차원에서 진행됐는지 지금 시점에서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적어도 경인철도나 경부철도처럼 장기적 관점이 아닌 임시방편이었다는 것은 전쟁 직후 철거된 사실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진평선은 철저히 군사용으로만 사용되었고, 당연히 조선정부와의 협의 내지는 부설허가 등도 없었을 것이다. 같은 군부에 의해 건설된 경의선과 마산선의 경우 사전에 조선정부를 상대로 부설권확보를 위한 시도가 있었고, 군부내 철도건설을 담당하는 부서(임시군용철도감부)에서 건설에 착수한 것으로 되어있다. 또한 정거장을 만들어 제한적이긴 했지만 일반인이 이용할 수도 있었다. 이에 반해 진평선의 경우 비록 짧지 않은 거리였지만 항구와 대도심을 연결하는 병참노선으로 일반인의 이용을 배제한 채 단기간 존재한 임시철도라는 점을 볼 때 철도의 효시로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패전 후 귀국한 일본인 철도직원들(鮮交會)이 훗날 방대한 자료를 모아 발행한 ‘조선교통사’에서도 진평선을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일본 쪽 입장에서도 진평선은 기록으로 남기고 싶지 않은(혹은 기록할 필요가 없는) 역사적 ‘사실’일 뿐이었던 것 같다.  

이제 우리는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노면전차나 진평선 군용철도가 모두 우리나라 철도의 효시로 보기엔 ‘함량미달’이고 ‘결격사유’가 있다고 한다면 과연 9.18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제 그 이야기를 해보자.

이 땅에 철도가 어떻게 놓이게 되었나 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꽤 많은 논의가 있었기 때문에 장황하게 다시 그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대체적인 흐름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1872년 일본에 철도가 들어온 이후 미국과 일본의 신문물을 접한 관리들에 의해 철도건설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자력으로 철도를 건설할 능력이 부족했던 조선을 상대로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이 부설권 확보를 위해 암투를 벌이다가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이란 미묘한 정치적 흐름을 타고 미국인 사업가 모스가 경인철도 부설권을 확보한 것이 1896년 3월 29일이었다. 허가조건상 1년 이내에 착공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인천지역의 부지확보에 문제가 생기자 다급해진 모스는 시종착 지점인 인천도 서울도 아닌 인천지역 우각현(소뿔고개)에서 기공식을 치렀다. 허가취소기한을 며칠 앞둔 1897년 3월 22일에……. 

 

이 날 이후 모스의 행적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결론적으로 모스는 경인철도부설권을 일본에 팔아넘긴다. 부설권을 넘겨받은 일본의 경인철도인수조합은 1899년 4월 23일 인천에서 다시 기공식을 하게 된다. 당시로서는 경인철도를 연내에 개통시키리라는 목표를 갖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은 대홍수를 만났다. 할 수 없이 계획을 변경하여 한강 이남까지를 먼저 개통시키고 교량완공 후 나머지 구간을 개통하기로 하였던 것이 9.18의 근본적인 탄생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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