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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아프리카에 폭설이 내린다면

박찬호 | 기사입력 2017/12/19 [09:19]

[기자수첩] 아프리카에 폭설이 내린다면

박찬호 | 입력 : 2017/12/19 [09:19]

[국토매일-박찬호 기자]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 577. 한국야쿠르트 본사는 기둥 30개가 떠받치고 있는 건물이다. 지하 주차장 곳곳에 박힌 기둥 때문에 처음 본사를 방문하는 사람은 주차에 애를 먹을 정도다. 시각을 가리는 기둥 탓에 답답함도 느껴진다. 한국야쿠르트 본사 대지 면적은 약 3306㎡(1000평). 109㎡(33평) 당 1개의 기둥이 박혀 있는 셈이다. 왜 이렇게 기둥이 많은 걸까. 답은 한국야쿠르트 사사에서 찾을 수 있다.


'사옥을 건설할 즈음인 1995년 1월17일, 일본 고베에서 커다란 지진이 일어났다. 지진 대처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인 일본도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를 본 윤덕병 한국야쿠르트 회장은 관계자들을 불러 공기가 늦어도 좋으니 설계부터 다시 하라고 지시했다. 감리사, 설계사, 시공사 모두 비상이 걸렸다. 두 세 차례 일본으로 가 지진대비 공부를 하고서야 설계가 완성됐다.


1996년 5월 한국야쿠르트 본사가 완공됐다. 처음 준공 목표였던 1995년 7월보다 1년 여 늦어졌다. 사사는 본사 건물에 대해 "진도 7~8도에도 끄떡없다"고 표현했다.


지은 지 20년 된 한 기업 건물이 눈에 들어오는 이유는 최근 한국을 뒤흔들고 있는 지진 때문이다. 그간 한반도는 지진 안전지대였다. 국내서 지진은 '아프리카에 폭설이 내렸다'는 얘기와 같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자연재해로 여겨졌다. 하지만 지난해 경주에 규모 5.8의 지진에 이어 올해 포항에 5,4의 지진이 일어났다. 국내 지진 관측 사상 최강 규모로, 서울에서도 지진이 감지됐다. 지금까지도 여진이 이어지고 있다.


1988년 국내에도 내진설계 의무 규정이 도입됐다. 한국야쿠르트가 본사 건물을 착공한 1993년에 이미 법적으로 내진 설계가 의무화되던 시절이었다. 내진설계를 더 강화할 이유가 없었지만, 한국야쿠르트는 시간과 돈을 더 투자했다. '아프리카에 내릴 폭설'에 대비해 쓸데없이 '제설기'를 마련해 둔 셈이다.


단 한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았지만, 온 나라가 지진에 대한 공포에 휩싸인 것은 지진에 대해 전혀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과 같이 내진설계와 대피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었다면, 분위기는 많이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한국야쿠르트의 본사 기둥들이 갑자기 눈에 들어온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는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가는 한국야쿠르트 경영방식과도 닮았다. 1969년 설립된 한국야쿠르트는 지난 48년간 발효유 외길을 걸어왔다. 라면과 커피 등으로 사업영역을 넓힐 때도 주력사업과 연관성을 꼼꼼하게 따지며 운신의 폭을 조절했다. 우직해 보일 수 있지만 답답해 보이는 걸음걸이다.


자연히 성장 속도는 더뎠다. 회사 설립 39년 만인 2009년에야 매출 1조원을 넘겼다. 작년 매출(연결 기준)은 1조1747억원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조바심 내지 않는다. 유산균 연구, 발효유 경쟁력 등 기본 체력은 더 강해지고 있다는 회사 내부의 확신 덕분이다.


한국야쿠르트의 '당 줄이기 캠페인'은 내진 설계가 더 강화된 본사 건물과 닮은 구석이 있다. 2014년 한국야쿠르트는 당 함유량을 최대 절반 낮춘 제품을 출시했다. 자칫 단맛에 길들여진 소비자들이 떠날 수 있는 위험한 선택이었지만, 판단은 정확했다. 올 초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당류 저감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맛보다 건강을 챙기려는 시장의 흐름을 읽어내 정부보다 한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기업 경영에도 '아프리카에 내린 폭설'처럼 예상치 못한 순간이 불쑥 찾아온다. 노키아는 스마트폰의 흐름을 놓쳐 한 순간에 몰락했고, 국내 기업들은 10년여 전 얕잡아봤던 중국 기업들에게 밀리고 있다. 위기에 처한 기업들이 20년 전 본사 건물 지하에 30개 기둥을 박은 '우직함'을, 때론 48년 된 야쿠르트에서 설탕을 빼는 '과감함'을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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