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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철도 비밀노트–8화] 한반도의 심장이 다시 뛰다, 남북화물열차 정기운행

양정규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21/06/22 [09:00]

[북한철도 비밀노트–8화] 한반도의 심장이 다시 뛰다, 남북화물열차 정기운행

양정규 객원기자 | 입력 : 2021/06/22 [09:00]

(기획특집 시리즈 남북철도 봄은 오는가) = 반세기 이상 단절되어 온 남북철도를 복원하기 위해 애써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측 인사들과 만나 실무협의를 하고 실제로 진행을 맡았던 실무자들의 생생한 이야기,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다양한 비화를 모아 전해드립니다. 남측과 북측이 나눴던 팽팽한 긴장감과 때론 따뜻하고도 찡했던 분위기를 느껴보세요. 매월 둘째 넷째 화요일, 남북철도 복원의 역사 속으로 함께 떠나요! =

 

[국토매일=양정규 객원기자/작가] 2007년 12월 11일 아침 경기도 파주시 도라산역은 한반도기를 흔드는 환송 인파와 취재기자들로 또다시 북적였다.

 

남북철도연결 시험운행 행사 후 7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날을 시작으로 남북화물열차가 경의선 문산~봉동(판문역) 구간 16.5㎞를 정기운행하게 된 것이다.

 

단 하루의 이벤트로 끝났던 시험운행 행사가 정기운행으로 다시 이어진 것은 1951년 한국전쟁으로 경의선 운행이 중단된 지 56년만의 정기운행으로 한반도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한 역동적 사건이었다.

 

▲ 남북철도연결 시험운행 행사 후 7개월만에 남북화물열차정기운행이 재개되자 도라산역은 한반도기를 흔드는 환송인파로 다시한번 북적였다.  © 국토매일

 

▲ 남북화물열차 정기운행이 장차 남북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세계 여러나라의 이목도 집중됐다.     ©국토매일

 

남북정기화물열차는 앞으로 토요일과 일요일을 제외하고 문산역에서 봉동(판문역)까지 매일 한 번씩 왕복 운행되며 개성공단 반출입 물량을 수송하게 됐다.

 

매일 아침 오봉역과 월롱, 문산역을 지나 도라산역에 도착하여 통관과 검역을 거친 뒤 매일 오전 9시 북으로 출발하며 봉동역(판문역)에서 짐을 내리고 싣는 작업을 마친 뒤 매일 오후 다시 도라산역으로 돌아오게 되는 스케줄이었다.

 

▲ 남북을 잇는 화물열차가 매일 오전 9시 도라산역을 출발해 9시 30분 판문역에 도착, 화물 상하차 작업을 마친 다음 오후 2시 판문역을 출발, 2시 30분에 도라산역에 도착하는 정기운행이 시작됐다.  © 국토매일

 

이날 운행될 남북정기화물열차는 문산역을 출발해 임진강역을 거쳐 도라산역 1번홈에 정차해 있었다.

 

남북출입사무소에서 간단한 수속을 거친 후 승무신고 등을 하기 위해서 이었다.

 

화물열차는 디젤기관차 1량과 컨테이너화차 10량, 화물을 인수인계 하는 인력이 타는 차장차 1량 등 12량을 기본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 화물열차에 적재된 컨테이너에는 개성공단에서 사용하는 원자재 등이 실려 있었고, 남측으로 내려올 때에는 개성공단에서 원자재를 가공하여 남측으로 내려오는 완제품을 싣고 올 예정이었다.

 

▲ 남측 문산역과 북측 봉동역(판문역)을 오가며 개성공단 화물을 실어 나를 남북화물열차가 12월 11일 오전 북측 판문역을 향해 가기 위해 도라산역에 정차해 있다.  © 국토매일

 

사실 남북정기화물열차 운행구간을 문산~봉동역 간으로 합의하였지만 판문역까지 운행하게 된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봉동역은 개성공단 2단계까지 활성화가 되면 화물터미널을 크게 짓게 계획되어 있어 당장은 화물을 취급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개성공단에서 약 1.5키로 정도 떨어져 있는 판문역을 임시로 화물취급장을 만들어 개성공단 반출입 화물을 취급하기로 결정하여 판문역까지 운행하게 된 것이다.

 

문산역은 컨테이너 취급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물량집하 하는 일과 통관 업무 등이 가능한 오봉역에서 열차를 조성하여 문산역에서 대기하여 하였다가 출발하는 것으로 하였다.

 

▲ 운행구간은 문산-봉동(판문역) 구간이지만 문산역이 컨테이너 취급이 어려운데다 물량집하와 통관 등을 감안해 의왕ICD가 있는 오봉역에서 북측으로 가는 열차를 조성하였다.  © 국토매일


남북철도 연결구간 열차운행에 필요한 동력차와 승무원 등은 홀수년도에는 남측이, 짝수년도에는 북측이 담당하기로 원칙을 합의하였고 남북당국간 합의가 있을 경우 운행년도가 아닌 측에서 열차, 승무원으로 운행구간을 운행할 수 있게 합의되어 있었다.

 

따라서 홀수해였던 2007년에는 남북정기화물열차 최초 기관차 및 승무원은 남측이 담당했다.

 

▲ 화물열차 승무신고 및 화물열차 출발 전 기념촬영.  © 국토매일

 

▲ 남북철도연결 시험운행 행사에서도 운행을 맡았던 기관사와 승무원들이 취재진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 국토매일

 

▲ 도라산역에서 화물열차가 출발한 뒤 앞으로 있을 화물열차 정기운행에 관련하여 이철 전 코레일사장이 도라산역사 직원들을 격려했다.  © 국토매일

 

56년만에 최초로 운행되는 남북정기화물열차 때문에 모두 들뜬 마음이었겠지만 특히 승무원들의 다짐은 남달랐다.

 

5월 17일 경의선 시험운행 때도 열차 운행을 맡았던 김재균 기관사와, 아버지 고향이 황해도 평산인 신장철 기관사 등은 시험운행 당시만 해도 꿈만 같았던 정기운행의 꿈이 이렇게 빨리 현실화 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기관사 등 승무원들은 이철 코레일 전 사장에게 승무신고를 마친 후 화물열차를 이끌고 기적소리와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어 개성 북으로 힘차게 달렸다.

 

▲ 꿈만 같았던 정기운행이 현실화되자 각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 국토매일

 

▲ 남북화물열차가 북을 향해 달리고 있다. 도라산역과 판문역 간 열차운행속도는 20~60km/h 이하로 운행됐다.  © 국토매일

 

한편 이날 오전 11시 판문역에서는 이재정 통일부 장관과 권호웅 북측 내각 참사 등 양쪽 인사 180명이 참석한 가운데 남북공동 화물열차 개통 기념행사가 열렸다.

 

남북 철도관련 인사들은 시험운행 이후 1년 안에 정기적인 열차 운행을 실시하겠다던 약속을 지켰다는데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이번 화물열차 운행은 북남경제협력의 상징인 개성공업지구사업에 활력을 부어줄 것입니다.“

 

▲ 한편 판문역에서는 남북공동 화물열차 개통 기념행사가 열렸으며 이재정 통일부 장관과 권호웅 북측 내각 참사 등 180여 명이 참석했다.  © 국토매일

 

북측 대표였던 권호웅 내각참사는 축사를 통해 남북화물열차 정기운행이 장차 남북경제협력에 지대한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하는 마음을 내비쳤다.

 

남측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이재정 통일부 장관 또한 이 역사적 사건을 통해 남북철도는 평양, 신의주를 지나 대륙철도와 연결됨으로써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를 새로운 물류망으로 통합하게 될 것이라며 부푼 꿈을 전달했다.

 

분계선을 넘어 북측 판문역까지 달려온 화물열차는 문산역에서 싣고 왔던 원자재를 먼저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개성공단에서 남북이 함께 생산한 신발과 옷가지들이 담긴 컨테이너를 바꿔 실었다.

 

이날 화물열차에 실렸던 물품 가운데 신발은 개성공단 입주업체인 삼덕통상이 생산한 것이었는데 문산~수색~서울~의왕역을 거쳐 부산진역까지 운송될 예정이었다.

 

화물열차는 남과 북의 노동력과 자본이 합쳐진 개성공단의 화물을 경의선으로 이동시키는 물류시대를 활짝 연 것이다.

 

▲ 이날 북한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신발은 경의선을 거쳐 한반도 남녁 부산까지 실려왔다. 개성공단 물동량 집하 및 철도운송 하역은 전문성을 감안하여 현대아산에서 담당하였으며 남북철도 화물은 국제화물송장을 준용하여 작성 처리하였다.  © 국토매일

 

남북화물열차 정기운행이 성사된 배경엔 무엇보다 2007년 10월 평양에서 열렸던 10·4 남북정상회담의 역할이 컸다.

 

당시 합의된 것 중 최초로 실행에 옮겨진 일이기도 했다.

 

그만큼 많은 수많은 협의와 실무 진행이 되어온 터라 가능했을 것이다. 남북화물열차 정기운행이라는 사건은 냉전의 대명사였던 남북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윈-윈의 실용적인 관계로 변화하기 시작한 신호탄인 셈이었다.

 

가장 반기는 곳은 역시 개성공단에 입주한 생산업체들이었다.

 

판문역에서 부산항까지 직통으로 컨테이너가 운송되기 때문에 예전에 트레일러로 갈 때 보다 훨씬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연간 12만 톤에 달하는 개성공단 물류의 절반가량을 경의선 화물열차가 담당할 것으로 내다봤다.

 

문산역과 판문역, 개성역을 잇는 통근 열차가 운행될 것으로도 예고되어 더욱 들뜬 분위기였다.

 

▲ 열차수송은 기존 선박수송에 비해 80% 정도의 물류비가 절감되고 수송시간도 대폭 단축되기 때문에, 화물열차 개통으로 개성공단이 활성화되고 철도를 통한 남북경제협력이 확대될 것으로 전망되는 분위기였다.  © 국토매일

 

남북정상회담을 마친 노무현 전 대통령이 평양에서 서울로 돌아오던 길에 들른 곳이 바로 개성공단이었다고 한다.

 

2007년 말 기준으로 개성공단은 약 60여 개의 기업이 가동 중이었으며 월 생산액 2천만 달러, 월 수출액 4백만 달러, 북측 근로자 2만 명이 일하며 남북경제공동체의 현장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그동안 지뢰가 깔려있던 비무장지대는 하루 1천 명의 인원과 500대가 넘는 차량이 왕래하는 평화의 통로로 바뀌어 있었다. 

 

화물열차 정기운행은 남북 화해의 상징성 뿐 아니라 남북철도가 실제 활용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로 철도수송은 기존 선박수송에 비해 80% 정도의 물류비가 절감되고 수송시간도 대폭 단축된다.

 

때문에 화물열차 개통으로 개성공단이 활성화되고 철도를 통한 남북경제협력이 확대될 것으로 모두가 기대했다.

 

당시 개성공단사업지원단 개발기획팀장이었던 박형일 통일부 남북회담운영본부장은 개성공단 시작을 한창 준비하던 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2002년 12월 밤이었을 거예요. 제1차 개성공단 실무접촉 이틀째였는데 회의가 열리던 금강산 여관은 무척 추웠죠. 개보수 준비로 모든 집기를 복도에 내놓고 손님도 받지 않는 빈 건물에서 난방도 되지 않고 때때로 정전도 되던 상황이었지만 남북 대표단들은 밤새 협상을 계속 했어요. 쉽게 좁혀지지 않는 입장차이가 있었지만 더이상 개성공단 출범을 늦출 수 없다는 공통의 인식을 바탕으로 하루 밤 사이에 적지 않은 분량의 ‘개성공단 통신 통관, 검역 합의서’를 만들어 낼 수 있었지요. 동이 튼 뒤 숙소인 해상호텔로 돌아가려 했지만 밤새 내린 눈이 사람 키 높이까지 쌓여 포크레인이 출동해 길을 낸 다음에야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 개성공단 발전 이전 모습부터 2004년 개발 초기 모습과 2007년 10월 1단계 개발 완료 모습(출처=통일부 남북협력지구발전기획단).  © 국토매일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첫삽을 뜨게 된 개성공단은 남북경제 뿐 아니라 평화무드를 조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서울에서 개성간 거리는 60㎞, 평양에서 개성간 거리는 160㎞로 개성은, 북한의 수도 평양보다 오히려 남한의 수도 서울과 더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으며 문산에서 개성공단까지는 2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로, 분단 현실만 아니라면 더 큰 경제적 요충지가 될 수 있는 곳이었다.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삼덕통산의 스타필드 브랜드인 신발 완제품이 남북화물열차에 실려 부산진역까지 들어갔다.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개성에서 부산까지 운송된 북한 제품이었다.

 

화물열차에는 신발뿐 아니라 개성공단에 필요한 원·부자재 등을 실어나르게 되어 있었다.

 

북한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신발이 경의선을 거쳐 한반도 남녘땅 부산까지 실려 온 이 날을 시작으로 남과 북은 경제교류가 활발해졌다. 

 

▲ 화물열차는 토․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1회 남북을 왕복운행하며 개성공단 반출입 물량을 수송하는 것 스케쥴로 운영됐다.  © 국토매일

 

2007년 12월 한달 간 화물열차는 편도 기준 28회 운행하였으며 총 219.5톤의 철도화물을 수송하였다.

 

이 중 남한에서 북한으로의 물동량은 180톤, 북한에서 남한으로의 물동량은 39.5톤이었고 수송된 것은 주로 개성공단 관련 반출입 물자와 대북 식량지원 물자로 알려졌다. 

 

화물열차는 실제로 남북간 물자 운송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개선시켰다.

 

정기적으로 대량의 물류 수송이 가능한 점과 수송시간의 단축, 열차 수송비용의 절감 등이 큰 변화였는데 열차수송은 해운 수송의 20%에 불과해 물류비 등의 부담으로 입주를 꺼리던 기업들의 불안감이 해소되기도 했다.  

 

남북철도 정기운행의 시작은 비록 화물열차로 제한적이긴 했지만 이 일을 계기로 실제 남북경제협력을 확대시키고 한반도 종단철도의 완전한 복원과 대륙철도 연결의 시금석이 될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 코레일은 물류비 절감으로 개성공단이 활성화되고 대북지원물자 및 남북경협물자를 철도를 통해 수송하게 되면 운행횟수가 점차 증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 국토매일

 

통일부와 코레일 등 철도 관계자들 역시 화물열차 정기운행이 제대로 정착되면 개성공단의 물류뿐 아니라 쌀 비료 등 남북경협물자나 대량 수송이 필요한 모래 석탄 등의 북한산 화물도 싣고 달릴 수 있을 거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또한 10.4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된 2008년 베이징올림픽 남북응원열차 운행이 실현되면 그동안 꿈으로만 이야기하던 한반도철도가 대륙철도의 시발점이 되는 꿈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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